배트맨, 진짜 악마와 맞서다! ‘초현실 스릴러’가 된 배트맨
조지 프랫이 스토리와 그림을 모두 맡은 『배트맨: 악마의 십자가』(이하 『악마의 십자가』)는 그림 스타일과 소재, 스토리 등 여러 면에서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와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장 큰 차이는 배트맨이 갖고 있는 탐정으로서의 면모는 『악마의 십자가』에서도 여전하지만 탐정인 배트맨이 해결해야 할 사건의 성질이 다른 시리즈들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6년 전, 소름끼치는 연쇄 살인 사건이 고담 시를 뒤흔들었다. 경찰과 배트맨의 노력에도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6년이 지난 어느 날, 살인자가 다시 돌아왔다. 배트맨은 계속되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범인의 정체를 추적한다. 그러던 중 그는 “살인이 벌어지기 전, 그 광경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소녀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베트남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부드로 박사에게 입양된 베트남 소녀. 배트맨은 루시의 예지력에 따라 연쇄 살인의 조각난 퍼즐을 하나둘씩 맞춰간다.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 환자의 죽음을 미리 볼 수 있는 의사, 치유의 힘을 가진 마술사……. 이 모든 단서들은 십자가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살인을 향해 모아지고, 배트맨은 드디어 고담 성당에서 이제껏 상대해보지 않았던 강력한 적, ‘악마’와 맞닥뜨린다. 비유가 아닌 실체로서의 ‘악마’와.
대대로 배트맨의 적이었던 조커, 리들러, 하비 덴트, 캣우먼, 포이즌 아이비 등은 고담 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어둠의 세력이자 ‘악당’들이었다. 그러나 『악마의 십자가』에서 적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다.
그래서 『악마의 십자가』는, 다소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적들의 싸움, 밀고 당기는 수사 과정과 화려한 액션 등이 펼쳐지는 여타의 배트맨 이야기와는 궤를 달리하는 ‘초현실 스릴러’ 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은 뒤틀린 십자가의 꼭짓점을 따라 벌어지는 연쇄 살인의 마지막 지점을 찾는 배트맨의 추리를 따라가며 거대한 초현실적 악과 대면하는 공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초현실적 공포를 구현하는 그림의 힘
배트맨이 힘겹게 싸우는 ‘초현실적 공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작가 조지 프랫의 그림이다. 검은 프레임 속에 담긴 한 컷 한 컷이 작가의 강한 개성과 노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악마의 십자가』는 한 권의 화보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읽게 되는 책이다.
분명한 선과 강한 원색을 특징으로 하던 기존 미국 코믹스의 특징과 결별한 ‘회화성 강한’ 그림체가 1980년대 이후 한 경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조지 프랫은 데이브 맥킨, 애슐리 우드, 켄트 윌리엄스 등과 함께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드에서 그림을 전공한 후, 화가(painter)로서 활동하는 한편 《헤비 메탈》 등 여러 잡지에서 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DC 코믹스 등 만화 출판사에서 커버를 담당하는 등 만화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다 1990년, DC코믹스의 오랜 시리즈였던 『에너미 에이스: 전쟁 목가』(Enemy Ace: War Idyll)를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수채화 기법을 사용해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한층 고조시켰던 이 작품은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를 얻었고, 조지 프랫은 그래픽 노블 작가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악마의 십자가』에서도 조지 프랫은, 배트맨이 대면하는 악의 강력함과 비교(秘敎)적인 분위기를 깔끔한 선과 밝은 원색 대신 음울한 색채의 회화적 그림체로 표현해냈다. 지배적인 색은 푸른색으로, 살인의 공포와 밤의 음산함을 뿜어내는 동시에 피의 붉은 색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중간에 삽입된 베트남의 상황은 황색 계열로 처리되어 시간과 공간적인 구분을 색채로 보여준다.
배트맨도 근육질의 강인한 히어로의 면모가 강조된 다른 배트맨들과는 달리, 다소 예민하고 불안한, 웅크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코스튬 역시 뿔처럼 뾰족한 귀와 꼬리 같이 긴 망토 등 마치 악마처럼 보이게끔 디자인 되어 배트맨의 ‘다크 히어로’로서의 특징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