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띵’ 하는 순간,
식탁 위에서 만나는 나만의 작은 세상
민음사 출판그룹의 만화․예술․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세미콜론’에서 새롭게 론칭하는 ‘띵’ 시리즈는 한마디로 ‘음식 에세이’이다. 앞으로 각 권마다 하나의 음식이나 식재료, 혹은 여러 음식을 하나로 아우르는 데 모두가 납득할 만한 주제를 가급적 선명하게 선정해나갈 계획이다. 이때 기본 원칙은 각자의 애정을 바탕으로 할 것.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더욱 할 말이 많아지고 마음이 분주해지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캐치프레이즈 삼아 이 시리즈는 꾸려질 예정이다.
각 권마다 주제가 바뀐다는 점에서 잡지 같기도 하고, 한 사람(혹은 두 사람)의 에세이로 온전히 채워진다는 점에서 일반 단행본 같기도 한, 무크지의 경계선에 이 책들이 놓여도 좋겠다. 그러면서도 시리즈의 고정된 포맷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제각기 자유로운 디자인과 내용 구성을 통해 작가의 개성을 충분히 담아내고자 하였다. 판형은 아담한 사이즈의 문고본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휴대가 용이해 부담 없이 일상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책의 모두(冒頭)에는 담당 편집자의 ‘Editor’s Letter’를 싣는다. 이것은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단행본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말 그대로’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비하인드 편집 스토리를 소개하거나 짧게나마 책을 안내하는 문장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것은 편집자의 목소리를 통해 조금 더 가까이 독자와 소통하고 싶은 출판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의사 가운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내 집 내 주방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요리하는 87년생 이재호
의사와 요리사.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해내는 이가 있다. 부산에서 의대를 다니다 말고 프랑스에 건너가 요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돌아온 의학도, 이재호가 바로 그다. 생각해보면 세부적인 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두 직종 모두 ‘칼’을 손에 쥔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닭 육수를 내기 위해서 생닭을 사다가 직접 ‘발골’하는 과정을 ‘집도’라고 표현하는 그의 농담이 사뭇 진지하게 들리는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그에게 ‘의사’는 ‘업(業)’이요, ‘요리사’는 ‘취미’쯤 될까. 그러나 지인들의 작은 파티에 케이터링 담당으로 섭외되거나 학업에 여유가 있을 때는 실제 레스토랑의 단기 셰프로 손님을 치르기도 할 정도로 그 실력은 출중하다. 의대에서는 ‘마카롱 오빠’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가족 모임에서는 오너 셰프의 마음으로 직접 준비해 풀코스로 식구들을 대접한다고 하니, 이미 그 업과 취미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도 같다.
프랑스 요리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아직 크게 익숙하지는 않은 듯하다. 피자나 파스타처럼 굉장히 보편화된 이웃 나라 이탈리아 음식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프랑스 음식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라타투이’ 정도를 겨우 영화 제목에 기대어 생각해낼 뿐이다.
이 책의 저자 이재호도 처음부터 프랑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기념일 같은 중요한 날, 분위기를 내고 싶은 마음에 멋쩍게 들어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메인은 어떤 것을 하시겠습니까?” “굽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도통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셰프의 말들을 들으며, 결심한다. 이것을 정복해야겠다고. 다소 도전적이고 엉뚱한 계기로 입문하게 된 프랑스 요리는 생각보다 깊고 심오했으며,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알면 알수록 신이 났다.
혼자 먹는 한 끼라도 대충 차리지 않겠다는 마음,
스스로 나를 잘 먹이고 대접하겠다는 의지,
그렇게 식탁에서 실천하는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
프랑스 요리학교 최우수 졸업장이 무색하게 그는 매일 아침 의사 가운을 입는다. 하지만 두 고양이가 있는 작지만 아늑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의사 가운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시작한다. 무엇 하나라도 대충 먹는 일은 없다. 매일매일 프랑스 정찬처럼 차려 먹을 수는 없겠지만, 떡볶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리대 앞에 선다. 아무래도 ‘자취 요리’다 보니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타협해야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마음껏 고집 부리는 부분도 있다.
자신만의 안전한 부엌에서 저자는 아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셰프가 된다. 양파를 두 시간 동안 볶고 볶아 ‘카라멜리제’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활용해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끓인다. 평범한 오리 다리살을 수비드하여 ‘콩피’로 탈바꿈시키고, 자갈치시장에서 잔뜩 사 온 해산물로는 ‘부야베스’를 차려낸다. 또 ‘감바스’를 만들어 먹고 남은 새우 껍질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비스크’를 만드는 식이다. 어쩐지 진득한 위로가 필요한 밤에는 커버추어 초콜릿을 녹여 만든 쇼콜라 쇼를 한잔 따라 마시면, 곧 마음이 포근하고 묵직해졌다. 프랑스 요리를 알기 전보다 알고 나서의 식탁은 훨씬 다채롭고 또 건강해졌다.
이보다 더 자신을 돌보는 행위가 또 있을까. 오직 단 한 사람, 나만을 위한 집중과 노동의 시간은, 고단한 일상을 오히려 극복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삼수 끝에 들어간 의대에서 유급을 당하고, 의사국가시험에 불합격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등등… 잇단 좌절의 순간에도 툴툴 털어내고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었다.
셰프이자 푸드 칼럼니스트 박준우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을 “모쪼록 최선을 다해 살아 있음을 즐기는 몸부림”이자 “오뚝이 같은 인간의 기록”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인간 오뚝이 이재호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르긴 몰라도 불 앞에서 보낸 시간의 힘 덕분일 것이다. 그가 식탁에서 실천하는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은, 반복되는 좌절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복잡다단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단단한 내면을 갖출 수 있을 만큼 느슨한 삶의 태도로 연결되었다. 새삼 느끼지만, 음식은 여러모로 힘이 세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삶은 내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지만,
오늘 먹을 내 한 끼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아마 앞으로도 그는 한참 동안 의사라는 정체성으로 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리하는 일을 멈추는 일도 없을 것이다. 5년 전 『한입이어도 제대로 먹는 유럽 여행』이라는 유럽의 진짜 맛집들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을 출간한 바 있지만 이번에 에세이 작가로도 데뷔하며 세 번째 정체성까지 추가했으니, 그가 앞으로 진료실에서는 환자를 치료하고 부엌에서는 나를 위한 요리를 하며 쌓아나갈 삶의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손수 밥을 지어 먹는다는 것
어찌할 수 없었던 날들
어디에도, 어디서도
세상에, 내가 이걸 해내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일
사랑을 잃고 양파를 볶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난 네가 편하길 원치 않아
사줄 돈 있지만, 만들어줄게
그런 제품은 쓰지 않습니다
당신이 찾던 유능한 인재
아버지도 홍합을 좋아하셨지
인심은 지갑에서 나온다더니
특별한 날 프랑스 사람들은
인생에 위로가 필요한 순간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
그게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서
카눌레 볼 때마다 내가 생각날 거야
무엇을 먹을지 고민해보셨습니까
한입이어도 제대로 먹자
일찍 들어와, 같이 한잔하게
고양이와 살고 있습니다
너라면 너랑 연애하겠니?
에필로그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