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매체와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만화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요 상들을 석권한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는 크리스 웨어를 미국 만화의 간판 스타, 아트 스피글먼 이후 가장 주목 받는 세계적인 만화가로 자리 잡게 만든 작품이다. 기이한 여정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모험담, 이틀 정도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장대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 구조,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자유롭게 구사되는 표현 기법들이 복잡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종이 인형 같은 캐릭터, 따뜻한 중간색으로 가득한 그림 속에 외로움과 공허를 담아 유머로 버무린 『지미 코리건』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대물림되는 가족사의 비극 자체로 충분히 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양한 표현 기법들과 비선형적 진행, 만화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깨버리는 칸 배치에서 독자들은 현실과 상상, 현재와 과거, 이야기와 이야기가 아닌 것들을 스스로 구분하고, 칸들의 순서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이런 독서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숨은 의미와 상징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링크를 통해 비순차적인 사건들이 상호 연결되고, 변형 가능해지는 ‘하이퍼텍스트’적 스토리텔링의 모범을 『지미 코리건』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픽 노블계의 주요 상을 석권한 20세기 최후의 걸작
2000년 말, 미국의 시사 주간지《타임》은 그해 출간된 만화 10선을 정리하며 크리스 웨어의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에 대해, 크리스 웨어가 시도한 시각적 장치들이 만화를 얼마나 깊이 있는 매체로 발전시켰는지, 스토리 역시 고전 문학에 비견할 만큼 보편적 주제와 정서를 탁월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이유로, 《타임》은 『지미 코리건』을 그해 ‘올해의 만화’ 1위로 선정했다.
이외에도 『지미 코리건』은 수많은 매체와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만화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요 상들을 석권하며 크리스 웨어는 미국 만화의 간판 스타, 아트 스피글먼 이후 가장 주목 받는 세계적인 만화가로 자리 잡았다.
줄거리
[1] 소심하고 외로운 독신남 지미 코리건이 난생 처음 아버지를 만나러 다른 도시로 갔다가 돌아오는 기이한 여정
시카고에 살고 있는 독신남 지미 코리건은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 아버지를 평생 만난 적이 없다. 어머니(에스텔 코리건)는 투정 잘 부리는 노인이 되어 요양원에서 지낸다.
소심하고 무기력한 지미 코리건은 어느 날 “한번 만나자.”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로 목발까지 짚고 가서 막상 만나고 보니, 이리저리 상상해 보던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는 뚱뚱한 외모, 실없는 농담 잘 던지는 여유로운 성격을 가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재혼한 부인과 함께 입양해서 애지중지 키운 딸 에이미에게는 사려 깊고 다정한 아버지다.
지미와 아버지는 저녁을 먹던 중 차를 도둑맞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렌터카를 빌린다. 지미는 아침에 목발을 짚고 산책을 나섰다가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갔다가 돌아온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뭔가를 사러 렌터카를 타고 나섰다가 눈길에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간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입양한 딸인 에이미가 달려온다. 에이미와 지미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가 같이 할아버지 집으로 간다. 두 사람은 다음 날 다시 병원에 가서 아버지의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2] 지미의 할아버지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지미의 할아버지는 부유했지만 몰락해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비정한 아버지(지미의 증조할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냉대를 받으며 자란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증조할아버지는 스스로 손을 쏴 부상을 입고 제대하지만, 아들에게는 전투 중에 적군에게서 입은 총상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이 임신시킨 흑인 하녀를 트집을 잡아 내쫓는 등 치사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당시 시카고에서는 만국 대박람회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20세기 모더니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거대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동안, 한 가족의 불행도 함께 진행된다. 할아버지 지미는 제법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아이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왕따, 집에서는 증조할아버지의 냉대로 늘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설상가상 집까지 빼앗기고, 대박람회 건축 현장에서 살게 되어 생활은 더욱 괴로워진다. 그리고 박람회가 개최되자마자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데리고 박람회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구경을 시켜준 후,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할아버지는 고아원에 가게 된다.
『율리시즈』에 비견되는 혁신적 스토리텔링
상징과 은유, 복선과 암시로 가득 찬 문학적, 지적 도전
이렇게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1]과 [2]가 구성되어 책을 만드는 방식은 무척 복잡하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다른 시간대의 내러티브는 뚜렷한 경계 없이 병치되고 비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꿈과 공상도 뚜렷한 경계없이 현실과 섞여 있다. 시점 또한 손자 지미의 시점, 할아버지 지미의 시점, 그리고 이 모두를 바라보는 제3자의 시점 등 복수 시점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한층 난해해진다. 사용된 서체들도 다양하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만화책을 읽는 순서와는 다르게 칸들이 배치된 경우도 많다.
중간에는 공간 배경에 대한 설명, 복잡한 가계도, 종이 공작물 평면도 같은 것들이 삽입되어 이야기는 종종 끊어진다. 그저 ‘여담’에 불과해 보이지만 캐릭터와 스토리, 작품의 주된 정서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중요한 장치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 기법들과 비선형적 진행, 만화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깨버리는 칸 배치에서 독자들은 현실과 상상, 현재와 과거, 이야기와 이야기가 아닌 것들을 스스로 구분하고, 칸들의 순서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기이한 여정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모험담, 이틀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장대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 구조,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자유롭게 구사되는 표현 기법들 때문에 『지미 코리건』은 종종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비교되곤 한다.
“일찍이 『율리시즈』가 그 현란한 언어 사용으로 독자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인체 묘사와 극도로 정교한 배경을 혼합시킨 웨어의 그림체야말로 만화라는 매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만만찮은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똑같다. 현란한 언어에 의해서나,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그림에 의해서나, 독자가 압도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월 스트리트 저널
『지미 코리건』은 『율리시즈』만큼이나 오래오래 두고 천천히, 반복해서 감상할 만한 묵직하고 의미 깊은 책이다. 독서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숨은 의미와 상징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링크를 통해 비순차적인 사건들이 상호 연결되고, 변경 가능해지는 \’하이퍼텍스트\’적 스토리텔링의 모범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하게 직조된 그래픽 디자인의 정수
크리스 웨어는 만화가이기도 하지만,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다.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이나 포스터, 책 표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인을 선보인 크리스 웨어에게 글과 그림이 결합되고 칸들이 연결되면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만화는 그래픽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다. 웨어는 『지미 코리건』을 통해 만화는 곧 디자인이라는 기본 개념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가가 우리나라에서도 만화팬들 보다는 디자이너들 사이에 크리스 웨어와 『지미 코리건』의 인지도가 더 높은 편인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 그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시키고, 접속사를 과감하게 한 칸 안에 꽉 채워 넣어 문자를 시각화 하는 등 독특한 표현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재킷부터 속표지, 면지에까지 책의 내용과 연관된 그림이나 상징, 문구들을 정교하게 넣어, 어느 하나 버릴 것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는 《타임》의 평에서도 드러난다. “『지미 코리건』은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라는 테마와 현대 사회의 불안을 어두운 유머를 곁들이며 탐구한다. 크리스 웨어는 만화에 최고의 디자인 감각을 불어 넣었고, 도표부터 1930년대식 글씨체까지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스토리와 캐릭터를 표현해 냈다.”
『지미 코리건』의 혁신적 그래픽 디자인은 표지에서 극대화된다. 커다란 포스터를 접어서 책을 싸도록 만들어진 표지는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읽어내야 한다. 구석구석에는 책 소개와 지미 코리건 캐릭터 소개, 잘라서 지미 코리건 만드는 종이 공작물 전개도, 지미의 하루 일과와 잡념들, 심지어 이 책에 대한 서평까지 잡다하게 실려 있다. 뒤집어 보면, 지구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오밀조밀한 그림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내용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한국어판에서는 작가의 원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한국어판 출간의 의의도 버리지 않도록 섬세한 한글화 작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원서의 다양한 서체가 주는 느낌을 살리는 서체를 사용했고, 필요한 부분은 원문을 그대로 둔 채 한글 번역어를 작게 병기했다. 또한 좁은 칸 안에 빼곡히 들어찬 글자들을 읽기 쉽게 확대하지 않고 번역을 절묘하게 조절했다. 한국어판 페이지들을 검수한 저자 측에서는 \”훌륭하다. 세심한 작업에 매우 감사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긴 여정 후 도달하는 반전과 짙은 감동
혁신적인 스토리텔링과 정교한 디자인을 감상하는 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종이 인형 같은 캐릭터, 따뜻한 중간색으로 가득한 그림 속에 외로움과 공허를 담아 유머로 버무린 『지미 코리건』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대물림되는 가족사의 비극 자체로 충분히 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죄책감과 원망, 그리움이 배어 있는 전언들을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하려 한다.
“그럼… 내가 실수로 낳은 자식이 어디 너 하나뿐인 줄 아냐?”
“솔직히 말해서 제임스, 널 다시 보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부지가 우리한테 하는 짓도 아주 자연스러운 거야…. 자기 살과 피를 물려받았으니 기
본적으로는 우릴 사랑하기야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고.”
“그리고… 저 이제 더 이상 아버지 원망하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흑, 요, 용서한다고요. 그
리고 이렇게 다 망쳐놔서 정말 죄송하다고요…. 훌쩍.”
예상하기 힘든 반전으로 인해, 과연 이 말들 중 그들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화해할 수 있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역시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여운을 쉽게 떨쳐내지 않고 감동을 되새기려면 면지까지 차분하게 감상하기를 권한다. 면지에는 단어 풀이를 가장한 작가의 후기가 담겨 있는데, 이 후기에는 책의 내용과 비슷한 작가의 실제 삶이 언급되어 있다. 크리스 웨어는 실제로 삼십 년이 넘게 잊고 살았던 아버지를 단 한 번 만났던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실제 삶을 작품으로 극복해 보고자 했음을 담담하면서도 코믹하게 풀어 놓았다. 가족의 의미와 인생의 아이러니, 그리고 예술가의 삶과 작품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이 페이지는 『지미 코리건』의 매력과 감동을 마지막까지 확인시켜 준다. 책을 덮으면, 처음엔 그저 소심한 ‘루저’로 밖에 보이지 않던 지미 코리건이 큰 슬픔과 외로움을 가지고 이어온 애잔한 삶에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