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 배트맨의 기원에 관한 혁신적 해석
1986년 DC 코믹스는 자사의 간판 캐릭터들을 쇄신할 필요를 느끼고 슈퍼맨, 원더우먼 그리고 배트맨을 우선적인 쇄신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배트맨은 그 자체로 훌륭했고, 기본 설정도 탄탄했다. 그래서 그들은 배트맨의 기원을 바꾸지 않는 대신 좀 더 구체화하기로 결정했다. 노년의 배트맨이 펼치는 활약을 다룬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로 슈퍼히어로 만화에도 철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프랭크 밀러가 다시 그 역할을 맡았다. 그리하여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배트맨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배트맨: 이어 원』(이하 『이어 원』)이 세상에 선보였다.
이야기는 제임스 고든이 고담 시 경찰서로 부임한 첫날 시작된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불안에 사로잡힌다. 강직한 고든이 마음에 들지 않은 부패한 고담 경찰국장과 그의 끄나풀들은 고든을 제거하려 계획을 꾸미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가 노상강도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본 후, 범죄와의 싸움을 위해 각지를 떠돌며 심신을 단련한 브루스 웨인도 같은 날 고담 시로 돌아온다. 범죄자들의 동태 파악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그는 창녀 셀리나 카일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혀 호송되던 중 가까스로 탈출한다. 부상을 입은 채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창으로 날아든 박쥐를 보며 ‘배트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박쥐 코스튬을 입고 드디어 배트맨이 되어 밤거리로 나선 브루스 웨인의, 공권력과 상관없는 개인적 범죄 소탕은 고담 시의 새로운 문제로 불거진다.
부패와 범죄라는 두 적과의 싸움, 동료 경사 에센과의 불륜 등 고민을 잔뜩 짊어진 고든에게 배트맨의 존재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되지만, 배트맨이 노파나 고양이를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을 본 고든은 배트맨에 대한 판단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한편 셀리나는 배트맨의 활약상을 지켜보다가 포주를 때려눕히고 업종을 전환, 고양이 코스튬을 입고 대저택에 침입하는 도둑으로 거듭난다. 배트맨의 영원한 연인이자 강적인, 파트너 ‘캣우먼’의 탄생이다.
이렇게 『이어 원』은 배트맨 시리즈에서 짧게 언급되었던 배트맨의 기원에 집중하여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는지, 제임스 고든이 어떻게 배트맨에게 호의적인 경찰이 되었는지, 그리고 셀리나 카일이 어떻게 캣우먼이 되었는지 등등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보여준다. 특히 제임스 고든의 사적인 이야기와 독백을 브루스 웨인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고 그가 조커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마지막 장면이 처리되는 등 고든에게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디럭스 에디션만의 스페셜 콘텐츠!
원래 『이어 원』은 DC 코믹스에서 잡지 형식으로 매주 발간하는 《배트맨》 404~407호로 연재되었던 것이다. 연재가 끝나고 나서 한 권으로 묶어 출간되었다. 이번에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이어 원』은 미국에서도 2005년 새로 나온 양장본 디럭스 에디션이다.
이 에디션에는 본편에 앞서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프랭크 밀러의 서문과 마주켈리의 후기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마주켈리의 후기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배트맨 만화와 드라마들에 대한 생각과 『이어 원』을 만들면서 고민했던 부분들이 녹아 있는 4쪽짜리 만화, 꼬마 시절 처음 그린 만화인 〈배트맨 코믹스〉그림, 배트맨 시리즈를 맡으면서 그린 시안들, 프랭크 밀러의 대본을 만화로 구성해서 비교해 놓은 자료들, 연재물의 표지와 본문, 색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 등 40여 쪽에 달하는 미공개 자료들로 구성되었다.
이 자료들을 통해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의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가의 원래 그림이 어떤 디자인과 만나 표지가 되는지를 알 수 있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DC 코믹스 직원이 만든” 커피 자국까지 선명한 마주켈리의 원화를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이만하면 “배트맨 팬들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의 평가에 덧붙여 이 책을 ‘배트맨 팬들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에디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와 『이어 원』
내용 없는 코스튬 파티처럼 변해가던 영화 배트맨 시리즈를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로 되돌린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다. 『이어 원』을 원작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는 히어로로 변모하는 계기와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어 원』과 같은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원래 다섯 번째 배트맨 영화는 2001년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프랭크 밀러와 함께 『이어 원』을 바탕으로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워너는 〈배트맨 비긴즈〉의 기획을 먼저 채택했고, 놀란 감독의 연출로 2005년 개봉되었다. 어쨌거나 힘을 잃어가던 배트맨 영화에 긴급 수혈되어야 할 것은 배트맨의 탄생 설화였던 것.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 되기까지 브루스 웨인이 거친 수련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반면 『이어 원』은 굵직하고 단순하게, 부패한 경찰 조직과 범죄자를 대상으로 고담 시에서 벌이는 배트맨의 싸움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화에 비하면 『이어 원』은 다른 캐릭터들을 최소화하고 브루스 웨인과 제임스 고든, 두 사람의 관계 설정에 많은 비중을 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신만의 버전을 창조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어 원』과의 연관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배트맨 비긴즈〉는 Batman: Year One를 비롯해 Batman: The Man Who Falls, Batman: The Long Halloween 등 만화 원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왓치맨』과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견줄 만한 책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배트맨: 이어 원』이다.” 《마이애미 헤럴드》
히어로의 탄생 설화를 새로 쓰는 것은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에 탄탄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슈퍼맨의 어린 시절을 조명한 TV 드라마 「스몰 빌」이 시리즈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며 큰 인기를 얻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등장한 헐크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도 평범했던 과학자가 초인으로 변모하는 전반부의 사연이 강조되어 있다. 이 외에도 히어로 시리즈의 프리퀄(본편보다 앞서는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들이 히어로의 활약 이상으로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이 요즘의 추세다. 히어로의 기원으로 파고든다는 것은 그 매력의 본질에 다가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변장하고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과 첫 활약을 그린 『이어 원』은 다시 한번 배트맨 시리즈를 오락적 액션 활극이 아닌 ‘진지한 느와르’로 인식하게 했고 ‘고뇌하는 분열적 히어로’라는 배트맨의 성격에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줬다. 전편들을 통해 산발적으로 주어졌던 설정을 섬세한 이야기로 다시 다듬어 캐릭터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이어질 시리즈들의 토대까지 마련한 『이어 원』은 이미 고전 반열에 오른 걸작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