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만화의 새로운 거장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한국 첫 출간작!
『완벽하지 않아』는 일본계(4세) 작가 에이드리언 토미네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만화다.토미네는 미국 만화의 주류인 슈퍼히어로 장르와는 전혀 다른 리얼리즘 노선을 걸으면서도 주목 받은 거장으로 입지를 굳힌 작가다. 언뜻 보면 일본 만화의 스타일을 지닌 듯하고 일본계라는 배경도 가지고 있어 망가의 영향을 받았을 법도 하지만, 실은 미국 인디만화계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로버트 크럼, 아트 스피글먼 등 1세대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들, 그리고 뒤 이어 등장한 2세대 거장 대니얼 클로즈의 뒤를 잇는 3세대 대표 작가로 크레이그 톰슨 등과 함께 현재의 미국 만화계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이미 “그의 세대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가들 중 한 명(《빌리지 보이스》)”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현대 미국 젊은이들의 우울하고 씁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유머를 잃지 않은 시선으로 예리하게 포착해 내는 그의 필력은 『완벽하지 않아』에서 만개하고 있다. 이 만화는 결점 투성이의 청춘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어울리는 풍경 속에 우리 삶을 비춰볼 수 있는 신랄한 블랙 코미디이자 순문학의 영역을 넘보는 문학성을 겸비한 작품이다.
하자 있는 청춘들의 찌질한 연애기
지지부진한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벤과 미코 커플. 벤은 극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고, 미코는 영화제 사무국에서 일한다. 첫 장면부터 이 커플은 싸우기 시작하는데, 영화에 대한 견해 차이로 툭탁거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애써 거부하면서도 이성 관계에는 끊임없이 인종 문제를 엮으려 드는 벤과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미코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게다가 늘 부정적이고 매사에 투덜거리기만 하는 시니컬한 벤을 두고 뉴욕으로 갈 기회가 생기자 미코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는 총 3부로 구성된다. 미코가 뉴욕으로 떠나는 데까지가 1부, 아쉬움을 달래면서 다른 (백인)여자들을 기웃거리는 벤의 이야기가 2부, 그리고 벤이 이상한 단서를 발견하고 뉴욕으로 가 미코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3부다.
“왜 죄다 그놈의 인종 문제랑 엮는 거냐고! 그냥 영화만 잘 만들면 되잖아.”
작가를 소개하는 첫 줄에서 밝혔듯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은 그를 설명하는 단편적이면서도 중요한 키워드이다. 권말부록으로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표면적으로 말하기를 상당히 꺼리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인 4세로 태어나 미국에서도 다문화적 속성이 강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각지를 떠돌며 성장한 배경, 버클리에서 보낸 대학 시절 그리고 초기작들에 작가 본인의 캐릭터가 등장했었던 전력을 보면 이 문제가 그에게 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종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백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포르노그래피를 열심히 챙겨 보는 벤, 그런데다 세상만사에 불평불만을 달고 살며 마치 위악을 떠는 듯한 벤의 태도에 지쳐버린 여자 친구 미코, 유쾌한 성격의 한국계 친구인 앨리스가 『완벽하지 않아』의 주요 캐릭터.
이 세 사람, 아시아계 미국인 청춘들은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을 인생의 문제로 떠안고 있지는 않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배경으로 짊어지고 있다. 초반부에 “별것도 아닌 영화를 아시아계가 만들었다는 거 하나로 띄워준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벤과 미코의 다툼은 이들이 과연 이 문제가 자신의 고민거리인지부터 고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들에게 이것이 불가피한 문제임을 증명한다. 나아가서 끝까지 인종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백인 남자 애인이 생긴 미코의 상황을 끊임없이 인종 문제로 엮어가려는 벤의 뒤틀린 사고방식은 스스로를 이 문제에 계속 옭아맨다.
“레즈비언이 아니고 박쥐 같은 양성애자라고.”
『완벽하지 않아』에서 성정체성의 문제는 인종 문제와 함께 큰 줄기를 이룬다. 벤의 유일한 친구인 앨리스는 동성애자이고, 미코가 뉴욕으로 떠난 후 벤이 만난 여자 친구 사샤는 양성애자이며, 앨리스의 동성 연인인 메레디스는 벤의 변화에 단서를 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들의 대화에는 성적인 코드는 물론, 성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캐릭터는 역시 앨리스로, 가족들에게 벤을 남자친구로 소개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가족들은 내가 한국 여자보다 일본 남자 만나는 걸 더 좋아할걸.”, “호모는 언제나 바닥”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무심하게 건넨다. 보수적인 한국 가족문화 안에서 동성애자라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앨리스는 민족적 정체성이 단지 외모의 문제라거나 인종 차별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자기 정체성’에 관한 만화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벤과 미코보다 인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자란 이민 1.5세이면서 보수적인 한국 이민자 커뮤니티 속의 동성애자인 앨리스는 『완벽하지 않아』에서 가장 논쟁적이며,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캐릭터일 것이다.
세상이 온통 씁쓸한 청춘의 쓰라리고도 아름다운 성장기
독자들에게마저 짜증을 유발시킬 것 같은 벤의 투덜거림, 모든 상황을 자기 방어를 위해 해석하는 벤의 시각, 인종 문제에 대한 벤의 이중성을 비난하면서도 거짓말을 한 채 뉴욕으로 떠난 미코. 이 커플은 위선과 이중 잣대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닮아 있는 한 쌍이다. 이 둘의 관계는 연인을, 나아가 타인을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마주 대하는 개인의 관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코드다. 그래서 이 책의 테마는 아시아계 미국인 젊은이의 연애담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인 청춘의 고민, 인간의 문제로 확장된다.
세 사람의 꼬인 상황에 한 가지 해결의 실마리를 던지는 이는 앨리스의 새로운 연인 메레디스다.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에 어른의 여유와 따뜻함까지 지닌 메레디스는 앨리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결국 앨리스는 그녀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떠나 새로운 세계에 정착한다. 그래서 앨리스는 『완벽하지 않아』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성장을 이루는 캐릭터다. 반면 연인과 헤어지고 유일한 친구와도 떨어져야 하는 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공허함을 안겨주는 마지막 장면은 벤에게는 유독 잔인하고 차갑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겪은 벤은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불안정하고 예민하며 냉소적인 토미네의 캐릭터들은 책 전체에서 열심히도 떠들어 댄다. 끝없는 말다툼, 그리고 비속어 가득한 방담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그림이자, 또 그들을 성장시키는 엔진과도 같은 것이다. 청춘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수놓아진 이 책은 쓰라린 상처의 기록인 동시에 치유의 작은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