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르제나 소바 | 그림 실뱅 사부아 | 옮김 김지현
출판사: 세미콜론
발행일: 2011년 8월 16일
ISBN: 978-89-8371-276-9
패키지: 반양장 · 140쪽
가격: 12,000원
분야 그래픽 노블
『쥐』,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마르지』!!
아트 슈피겔만은 만화 『쥐』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담았다. 마르잔 사트라피는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를 보고 『페르세폴리스』에 자신이 겪은 이란 혁명기를 그려냈다. 『마르지』는 국내에 첫 소개되는 폴란드 작가의 자전 만화이다. 작가인 마르제나 소바는 1980년대 폴란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지금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동유럽 폴란드 이야기는 출간 후 프랑스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마르지』는 『쥐』와 『페르세폴리스』의 뒤를 잇는 르포 만화의 걸작 대열에 합류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동유럽 폴란드의 일상은 언론을 통해서 밖에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역사적으로 먼 과거가 아니다. 불과 30여 년 전, 그 때만해도 전 세계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 진영으로 나뉘어 반대편 진영 국가에 방문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의 30대 독자들에게도 당시 동유럽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려진 역사인 동유럽. 한 소녀의 눈을 통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이야기
폴란드는 우리에게 지리적으로도 먼 데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낯선 나라이다. 하지만 폴란드라는 이름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는 있을 것이다. 바르샤바 공국, 아우슈비츠, 과학자 마리 퀴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음악애호가라면 쇼팽 콩쿠르, 축구팬이라면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 팀과 경기 했던 폴란드 대표 팀이나 폴란드 출신으로 독일에 귀화한 축구 스타 포돌스키나 클로제가 기억날 것이다.
『마르지』의 주인공은 역사적 인물도, 유명한 스타도 아니다. 평범하기만 한 소녀 마르지는 폴란드에서 꿈 많은 소녀로 자라난다. 만화에서 기억하는 시간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마르제나 소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고 매혹적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기 이전의, 어느 역사책에도 적혀있지 않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독자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동유럽에 대한 지식은 흑백 사진 같은 것이며 마치 처음으로 컬러텔레비전을 본 것 마냥 생생한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1980년대, 동유럽 폴란드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화는 크리스마스에 먹을 실한 잉어를 사서 욕조에 며칠 담가두는 폴란드 풍습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 이야기로 끝난다. 놀랍게도 폴란드 국민들은 (형식적이 아니라) 미사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오랜 가톨릭 문화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카페트를 사러 체코에 가는 자유는 있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당시 동유럽 사회가 갖고 있던 여러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닥뜨릴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 정권 하에서 식료품, 생필 공산품을 배급받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날, 같은 시간, 다 같이 한 가지 물건만 구할 수 있어 지역 주민 전부가 같은 냉장고, 같은 휴지를 쓰게 된다. 이러한 계획 경제아래에서 힘을 지닌 것은 생필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식료품점 직원들은 신선한 ‘오렌지’를 제일 먼저 사둘 수 있고, ‘고기’를 도축할 수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는 학교 선생님에게 총애를 받는다! 심지어 마르지 엄마조차도 주유소 근처에서 일하는 덕분에 기름이 들어오는 순간에 재빨리 구입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기억은 마치 일기를 들쳐보는 것처럼 상세하다.
이 만화 속에서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80년대의 비극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에피소드도 눈여겨 볼만하다. 약이 부족해 어른들은 먹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약을 먹였다는 작가의 아픈 기억은 어떤 언론의 기사보다 큰 울림을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제나가 추억하는 7~10살 마르지의 인생사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기 신공, 단짝 친구와의 소소한 갈등, 이유 없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체육 선생님, 지칠 줄 모르는 엄마의 잔소리와 꾸중, 스타의 헤어스타일 따라 하기, 나보다 좋은 학용품을 갖고 있는 친구를 보고 기죽었던 기억……. 1980~90년대 서민가정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마르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와 역사는 달라도 유년 시절의 보편성 덕분에 소심함과 예민함, 천진함과 조숙함을 두루 보여주는 마르지의 일상은 낯선 나라 폴란드의 낯설지만은 않은 유년의 이야기이자 문화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