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사진가 Le Photographe』는 1980년대 후반, 소련과 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진료 봉사 중인 ‘국경 없는 의사회’와 동행하여 르포 사진 작업을 하게 된 사진 기자의 이야기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소련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 아프가니스탄 전역의 병원과 진료소 열다섯 곳에 치료와 의약품, 현지 의료진 교육 등을 담당할 팀을 파견하면서, 무자헤딘과 소련군의 대치 상황에 시달리는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작가 디디에 르페브르는 국경 없는 의사회의 요청을 받아 이 의료팀에 합류하여 이들의 구호 노력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소련 접경 지역의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 책은 만화가와 사진가의 협업을 통해 그림과 사진이 어우러지는, 다큐멘터리에서 보기 힘든 참신한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독특한 형식을 통해 현대 세계사에 커다란 방점을 찍은 사건인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일면을 보여주고,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의 피폐한 삶과 그들을 보듬는 또 다른 이들의 모습을 통해 큰 감동을 안겨준다.
사진과 만화의 멋진 만남
사진기자 디디에 르페브르는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던 만화가 에마뉘엘 기베르에게 아프가니스탄 취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진들을 보여준다. 수천수만 장의 사진들이 있더라도 세상에 공개되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 사진들은 기자 개인의 소장품으로 어딘가에 보관되어 잠들어버리기 일쑤다. 르페브르는 그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친구에게 보여준 것이다. 기베르는 이 사진들에서 큰 영감을 받고, 르페브르와 함께 그의 경험을 만화로 옮긴다. 이것이 『평화의 사진가』의 탄생이다.사진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기만 해도, 그것은 만화의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이 책의 주된 기법은 만화책의 칸 속에 원래 밀착 인화했던 사진을 배치한 것이다. 밀착인화 사진은 일반적으로 필름 한 롤을 한 장의 인화지 안에 작은 크기로 한꺼번에 인화하게 된다. 이것은 만화책 페이지의 칸 나눔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저자들은 이런 속성에 착안해 페이지를 편집하여 사진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을 그림이 보완하고, 그림으로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사진이 표현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도록 했다.
전쟁의 이면과 마주한 4개월
국경 없는 의사회와 그는 험준한 지형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까? 전쟁 중인 나라에 투입된 활동가들이라면 죽어가는 사람을 기적적으로 살려내는 숭고한 정신의 의사들, 죽음을 무릅쓰고 현장을 기록하는 용감한 사진기자?이 책 속의 의사들은 그저 문제를 해결하듯,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뿐이고 환자들 중 어떤 이들은 손쓸 수 없이 죽어간다. 디디에 르페브르는 매사에 불평투성이에 의존적인 인간이다. 그는 심신이 지친 채 빨리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책 속의 아프가니스탄은 죄 없이 희생되는 착한 사람들, 일상화된 전쟁 속에서 무기도 장난감이 된 아이들의 땅일 뿐 아니라 버젓이 설치고 다니는 부패 경찰, 투숙객을 곤경에 빠뜨리는 여관주인, 도움을 약속하며 돈을 먼저 요구하는 카라반들의 땅이기도 하다. 『평화의 사진가』는 한 프랑스인 사진기자가 그곳에서 겪는 문화, 관습, 종교관의 차이를 포함해, 이 모두를 가감 없이 기록했다.
디디에 르페브르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디디에 르페브르가 의료팀에 합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선 파키스탄으로 들어간 그는 이슬람 사회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여성 리더’ 줄리에트가 이끄는 의료팀을 만나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면서 서서히 현지 적응을 한다. 2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체험이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르페브르는 피폐해진 삶 속에서도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동하는 한편 그곳에서의 고된 생활에 지쳐간다. 3부에서는 사진 작업을 마친 르페브르가 의료팀과 헤어져 혼자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전개된다. 그는 큰소리치며 팀과 헤어지지만 추위와 거친 지형,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황폐한 땅 아프가니스탄에 피어난 인류애
디디에 르페브르는 험준한 봉우리를 넘으며 피곤에 절어 있다가 자문한다. “도대체 내가여기까지 와선 뭘 하는 걸까?” 그는 결국, 사진을 찍으며 답을 찾는다. 그는 그토록 넌더리를 냈던 아프가니스탄에, 그 후 일곱 차례 더 방문해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순박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의사 동료들과의 연대감으로 인해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변화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4개월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방점을 찍었고 사진 작업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중동, 아시아권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에 지속적이고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르페브르는 2007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평화의 사진가』가 그해의 공식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되는 기쁨을 맛본 지 이틀 만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원래 세 권으로 출간되었다가 5년 만에 출간된 합본판에는 디디에 르페브르가 이후에도 수차례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며 찍은 사진들이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편집진은 합본판 화보를 이렇게 소개하며 그를 추모했다.“ 사진 속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이 변화하는 모습을 느낄 수있고, 아프가니스탄의 마를 줄 모르는 매력에 사진작가인 디디에가 어떻게 매료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는 2007년 1월 29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금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 아프가니스탄의 어느 길 위에 있거나 그곳으로 떠날 생각에 맘 설레고 있었을 것입니다.”당시 의료 봉사를 끝낸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들 역시, 아프가니스탄과의 끈을 쉽게 놓지 못했다. 이들의 후일담은 인물 소개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분쟁의 땅에서순수한 마음으로 의술과 인류애를 펼치면서도 이야기 속에서조차 자신을 크게 내세우지 않고 오직 진솔하게 드러낸 작가의 작품은 감동이라는 표현을 뛰어넘어 커다란 울림으로 남는다.
세계의 화약고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지난 연말부터 새로운 이슈로 대두되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미군 3만 명 이상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증파할 계획을 수립했고, 우리나라도 320명 정도의병력을 재건을 위해 파병한다는 안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관계는 2001년 9/11 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이 처음은 아니다. 두 국가의 미묘한관계는 『평화의 사진가』의 배경인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1978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여 공산 정권이들어섰다. 전통적인 이슬람 다민족 국가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신無神 정부가 지휘하는 개혁 정책은 즉각적인 반발을 사게 되고, 곧 각계 각파의 이슬람 부족들은 ‘지하드(성전聖戰)’를 선포한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이슬람 전사’를 뜻하는 게릴라 ‘무자헤딘’과의 내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소련 통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아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소련은 자국에 협조적인 인물로 대통령을 대체하기 위해 1979년 대대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감행한다. 그러나 전세는 소련의 처음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무장 게릴라의 격렬한 저항과 거친 산악 지형, 서방 세계의 강력한 철군 압박, 늘어나는 전쟁 비용과병력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소련군은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십 년간 소련의 점령 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정치적 구조는 이미 붕괴되었으며 국토와 일상생활은 초토화되었다.『평화의 사진가』가 보여주는 20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지금도 상황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킨다. 침공한 국가가 소련에서 그 적국이던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들은 다르지 않다. 게다가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했던 당시, 반소 진영의 게릴라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들은 9/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지금 미국과 치르고 있는 전쟁의 뿌리가20년 전 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은 역사의 아이러니와 비극을 느끼게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한 생생한 기록, DVD 영상 수록
국경 없는 의사회의 일원이자, 신기하게도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리더였던 쥘리에트 푸르노는 디디에 르페브르의 사진 작업과는 별개로 자신들의 활동을 직접 영상으로 남겼다. 『평화의 사진가』의 부록인 「국경 없는 하늘에서」가 바로 이 영상을편집한 것이다. 시장, 카라반과 함께 이동했던 산악 지대, 수술 순간, 빈곤하고 피폐한 생활, 그곳에 들어가 구호 작업을 하는 활동가들의 모습 등을 생생히 기록한 40분짜리 영상물로, 무심한 듯 촬영한 화면과 담담한 내레이션 뒤로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장면들, 그림과 사진으로는 다 알 수 없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소리들을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 대표 사진작가 김중만의 추천
국제 아동 후원 단체인 플랜 인터내셔널의 한국지부 ‘플랜 코리아’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김중만은 이 책을 접하고, 추천의 글을 남겨 주었다. 김중만 작가는 플랜코리아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의 아이들을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나눔의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디디에 르페브르의 작업도 크게 다르지않은 마음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같은 사진가로서 크게 공감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 테러라는 말로 얼룩진 금단의 땅 아프가니스탄이지만 디디에 르페브르가 필름 가득 담아온 진실이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임을 알게 해 준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추천의글을 전해 왔다.
사진과 만화가 어우러져 희망을 전하는 책.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읽어내려 갔다.아프가니스탄. 갈 수 없을 것 같은 금지의 땅.아픔과 공포, 슬픔이 있는 나라.디디에 르페브르는 그곳에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다녀온다.그리고 필름 가득 진실을 담고 돌아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아름다운 땅과 인간의 이야기를.테러와 전쟁과 무서운 선입관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춰진 나라 아프가니스탄.그곳에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김중만 | 사진작가, 국제아동후원단체 플랜코리아(Plan Korea) 홍보대사